우치다 다츠루 교수가 쓴 <스승은 있다> 113쪽 ‘오독할 자유’라는 제목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글쓰기를 반성해본다.
저자는 먼저 다자이 오사무가 쓴 ‘여시아문(如是我聞)’의 한 구절을 예로 들었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자네들은 ‘마음을 다하는 것’이 뭔지 모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절’이라고 말해버리면 너무 노골적이어서 함축성의 맛이 없다. ‘마음 씀씀이’, 이렇게 말해도 딱 들어맞지 않는다. 말 그대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작자가 마음을 다한 것이 독자에게 통했을 때 비로소 문학의 영원성이라든지 혹은 문학의 고마움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인용글에서 문학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자이 오사무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몇 번이고 고쳐 말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라고 주문한다. 이 인용글이 만약 국어 시간에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말하기’ 수업에서 써 낸 글이라면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겠지만 다자무 오사무의 천재성이 깃들어 있는 글이라고 평가했다. ‘이해와 오해가 닿을 듯 말 듯 빠듯하게 접근하면서 절대 백퍼센트 이해는 되지 않게 쓴’ 점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 문장을 쓰면 누구도 읽어주지 않습니다. 역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술술 읽히는 문장을 써도 누군가 두 번 이상 읽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마음을 울리는, 확실히 그렇다고 납득이 가긴 가지만 어디가 어떻게 납득이 가는지를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그래서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그런 문장이 바로 독자에게 강하게 침투하는 문장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독자에 대한 신뢰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뢰를 받고 있다 혹은 해석이 나한테 위임되어 있다는, 부여된 책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의 스승님들은 글은 항상 상대를 배려한 서비스가 되도록 쉽고 친절하며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써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배운 바를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쳤고, 내 글은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써왔다. 한 단락은 다섯 개 내외 문장으로, 첫 문장이나 끝 문장에는 전하고 싶은 핵심을 담아야 하며...... 내가 쓴 글은 솔직히 말해 참 재미가 없다.
글쓰기에서 기초를 마쳤으면 중급과 고급 글쓰기로 나아가야 했는데, 대학에서 배운 “글이 곧 사람이다.”는 엄한 가르침에 눌려서 사람도 글도 자라지 못한 탓이다. 저자는 너무 술술 잘 읽히게 쓰는 것이 독자에 대한 신뢰 부족 나아가 독자의 능력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했다. 스승님의 가르침도 옳고 우치다 타츠루 교수의 지적도 옳다. 나는 학생 가르칠 일이 거의 끝나가니 이제부터라도 ‘확실히 그렇다고 납득이 가긴 가지만 어디가 어떻게 납득이 가는지를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그래서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그런’ 글에도 도전해 볼까 한다.
(20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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